*삼국지 글을 쓴 이후 오랜만에 다시 쓰게 됬습니다.
*태조 왕건으로 유명한 45년간의 후삼국시대를 다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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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하고도 200여년 동안 존속해오던 신라는 골품체제의 모순과 지속적인 왕위계승 싸움으로 인해 내리막길을 걷고있었어. 이 시점에서 신라의 50대왕 정강왕이 죽고 한국사의 마지막 여왕인 진성여왕이 등극하게 돼. 진성여왕은 49대 헌강왕, 50대 정강왕이 모두 요절하면서 형제 계승에 의해 왕에 등극하는데, 이때 겨우 20대 초반에 불과했지. 불행하게도 진성여왕이 등극할 당시 사회적 모순이 극에 달해 지방에서 호족들과 비적들이 반기를 들고 자립했지만 전혀 이를 막을만한 역량이 없었어.
진성여왕은 즉위한 해 죄수들을 사면하고 세금을 면세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려는 노력을 했으나 그것 뿐이었고, 즉위 3년이 되던해 889년. 국내의 여러 주군에서 공물을 바치지 않아 매우 궁핍해졌다고 해. 이 때문에 세금을 독촉하는 과정에서 사벌주(상주)에서 원종과 애노가 농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지. 초한지의 진승과 오광의 난, 삼국지의 황건적의 난과 같이 난세의 시작을 알리는 농민반란이 시작된거야.
신라조정은 영기를 토벌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상주에 급파했지만 상주에 도착한 영기는 예상외로 반란군의 규모가 너무 커서 겁을 먹고 진군하지 못해. 이때 토벌군에 종군했던 우연이 군을 이끌고 나가 반란군과 맞서지만 패배하고 전사해. 결국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영기는 책임을 면치 못하고 진성여왕이 참수시켜. 이후 원종과 애노의 난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이 둘의 행적은 묘연해, 더이상 기록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야.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지.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킨 사벌주, 즉 상주는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의 본거지로 익히 알려져 있어. 그리고 원종과 애노의 난과 비슷한 시기에 아자개는 상주성을 점거하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해.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이 견훤의 설화인데, 아자개가 농사를 짓고 있는 사이 견훤의 어머니가 아자개에게 음식을 날라주기 위해 어린 견훤을 나무 밑에 놓아두었는데, 지나가던 호랑이가 젖을 먹였다는 이야기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자개가 농사꾼이며, 유모를 둘 정도의 부농은 아니라는 추측을 할 수 있어. 또한 아자개의 기록에서도 아자개는 농부였으나 집안을 일으켰다라고 되어있어. 이를 보고 추측을 해보자면 아자개가 원종과 애노의 난에 참가했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고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야.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당시 신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견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부자간의 갈등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어.
어쨌거나 난세의 서막을 알린 이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신라 각지의 호족과 비적들이 스스로 자립하기 시작했어. 신라의 중앙 정부는 이들을 통제할 여력이 전혀 없었고, 각각의 호족들은 세력을 넓히기에 여념이 없었지. 수많은 호족들이 난립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바로 아자개의 아들 견훤이야.
견훤은 성이 진씨이기 때문에 진훤으로도 불리지만 여기서는 우리가 익숙한 견훤으로 부를게. 견훤은 아자개의 5남 1녀 중 장남이야. 아자개는 견훤말고도 능애, 용개, 보개, 소개와 딸 대주도금이 있었어. 이들도 꽤나 능력이 출중했는지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고 해. 아마 아자개를 도와 상주를 점령했던 것 같아. 그러나 아자개가 상주에서 세력을 키워나갈 당시 견훤은 신라의 군인이었는데, 경주에 있다가 서남해안으로 보내졌어. 이때 견훤은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워 승진을 거듭했고, 병사들에게 인망을 얻었다고 해.
그렇다면 견훤은 누구와 싸웠다는 것일까? 견훤이 보내진 서남해안은 지금의 순천지방으로 추측돼. 이곳에는 승평항이라는 항구가 있고 해상무역을 통해 성장한 호족들이 있었어.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장보고 사후 더욱 기승을 부리던 해적들이었는데 견훤은 이들과 싸웠던 거야. 당시 순천의 호족은 위의 지도에 나온 승주호족 박영규의 가문인데, 이들은 골칫거리인 해적을 소탕해주는 견훤을 지지하였고 견훤은 경제적인 기반을 가지게 된거지. 또한 이곳은 국제항이었던 만큼 유학생과 유학승들이 오가던 곳이었고, 이들을 받아들이면서 인재들을 확보해 나갔어. 신라의 비장이었던 견훤은 이곳에서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탄탄히 쌓아나갔던 거야.
892년. 원종과 애노의 난이 발발한지 3년이 되던해에 견훤은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어. 견훤이 반기를 든 이유로 아자개가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면서 어쩔 수 없는 행보였다는 견해도 있지만, 견훤 역시 야심가였고 뛰어난 정치적 안목을 가졌기 때문에 충분히 자의로 세력을 구축하려고 했던 것 같아. 견훤은 순천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무주를 공격했는데, 오히려 이 지역 사람들이 견훤을 환영해서 견훤은 한달만에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5천에 다달았다고 해. 견훤은 무진주를 장악하고 스스로 왕에 올랐는데, 대외적으로는 감히 왕을 칭하지는 못했어. 그러나 이때 북원에 있던 양길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내부적으로는 왕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봐야돼. 당시 견훤의 나이는 불과 26세.
이후 견훤은 '백제의 재건'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주, 무주, 공주등 옛 백제땅들을 수복해 나가. 또한 인구와 물산이 풍부한 호남 지역에 기반을 공공히 했고,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면서 대외적으로 국가로 인정받는 작업을 해나가기 시작했어. 결국 900년에 견훤은 수도를 광주에서 전주로 옮기고 백제의 재건과 의자왕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후백제 건국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 뒤 신라로부터 독립하게 되지. 순천에서 거병한뒤 후백제의 건국까지 순탄하게만 보였던 견훤의 행보에는 그러나 몇가지의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었어.
(수달이가 죽었어~) 태조왕건에서 매우 유명한 대사 중에 하나야. 태조 완건에서는 수달, 즉 능창이 견훤과 의형제급으로 묘사가 되지만 실제로 수달은 견훤과 그런 사이는 아니야. 이 인물은 나주 지역의 해적단 두목정도 되는데, 나주 호족들의 해상무역을 보호하고 그 대가를 삥뜯는 위치에 있었어. 여기서 삥뜯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견훤이 순천지역 호족들의 해상무역을 보호했었던 점과 유사하지만 나주호족들의 지지를 받느냐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였거든. 나주호족들은 잠재된 불만을 가진 상황이었는데, 세력확장에 여념이 없던 견훤은 수달과 협약을 맺어.
견훤은 나주를 후백제 영향권 아래에 두는 대신 수달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식으로 손을 잡은 것으로 보여. 나주 역시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지역이었는데, 견훤에게는 이미 순천지역의 국제항이 있는데다 후백제의 건국은 백제를 멸망시킨 당과 외교관계를 맺지않는 것을 골자로 하면서 나주지역의 경제기반에 큰 타격을 주게 돼. 또한 무주나 나주는 백제의 재건이라는 열망이 그리 크지 않은 지역이야. 백제는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일대를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인데, 견훤이 광주에서 전주로 수도를 옮기게 된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해. 결과적으로 나주는 후백제에 대한 불만이 많이 잠재되어 있는 지역이였고 후삼국이 정립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백제의 발목을 잡게 되는 거지.
한편, 역시나 후삼국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궁예야. 궁예는 신라 왕족 출신이야. 궁예의 아버지는 신라 48대 경문왕으로 추측되는데, 이럴경우 진성여왕과는 남매사이가 돼. 다만 배다른 남매야. 궁예가 태어날때 단오날이였고, 치아가 있으며 집 위로 흰 빛이 뻗어나가는 것이 신라왕실에 불길한 징조라 하여 갓 태어난 아이를 누각에서 던졌는데 이때 유모가 아이를 받을 때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개인적으로는 궁예의 어머니 가문이 역모에 휘말려 모조리 죽임을 당할때 유모가 구해 탈출한게 아닐까 추측해봐.
어쨌거나 유모는 강원도 영월까지 가서 궁예를 키우게 되는데, 궁예는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유모를 어머니라 여기며 살고있었어. 그러나 애꾸눈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인지 포악한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데 이를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었던 유모는 결국 궁예에게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게 돼. 출생의 비밀을 알고 큰 충격을 받은 궁예는 결국 유모곁을 떠나 선종이라는 법명으로 절에 들어가.

그러나 신라왕실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야망을 억누를 수 없었던 궁예는 곧 세달사에서 나와 시류에 몸을 맡기게 돼. 궁예는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충분히 무리를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지방의 세력가들을 면밀히 관찰해. 당시 강원도에 있던 궁예는 근처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양길의 세력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죽주에 있던 기훤에게 몸을 의탁하게 돼. 이것으로 볼때 당시 기훤은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충분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것 같아. 궁예 역시 양길보다 기훤의 세력이 강하다고 판단했을 거야. 이 때문에 기훤은 주변에서 그에게 귀부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기훤에게 궁예는 일그러진 용모를 지닌 일개 승려에 불과했어.
결국 궁예는 기훤에게 환대를 받지 못했지. 그는 같은 생각이었던 원회, 신헌등과 비밀리 결탁하며 우울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가 마침내 기훤을 떠날 결심을 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던 궁예는 날개를 펼칠 새로운 둥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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